/ 강민서, 쇼마노바 아루잔, 장호근, 최선율 제 1기 한–카 청년 인턴 기자
바슈토베 언덕에는 글씨가 희미해진 오래된 묘비들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또렷이 읽기 어려워도, 그 자리에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해졌다. 낯선 땅에서 버티며 한 생을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89년 전 열차를 타고 우슈토베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간 이들 가운데 누군가의 마지막 자리가 이곳 묘역에 남았다. 강제 이주의 역사를 배우러 온 자리에서, 청년 기자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견뎠을지 생각하게 됐다.
지난 10월 23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우슈토베 역사탐방에 ‘제1기 한-카 청년 인턴 기자단’이 동행했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과 함께 기차역과 박물관, 바슈토베 언덕을 돌아보고 이튿날에는 알틴에멜 국립공원을 찾았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소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을 되돌아보게 했다.
우슈토베 기차역에서는 고려인 드미트리 씨의 설명을 듣고, 박물관에서는 엘레나 씨의 안내로 강제 이주와 초기 정착의 과정을 살폈다. 특히 땅을 파 만든 주거 공간을 살펴보며, 낯선 곳에서 먹을 것과 추위를 피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절실했을지 헤아렸다. 바슈토베에서 마주한 무덤은 그렇게 이어 온 삶의 흔적이었다.


고려인들을 도왔던 카자흐 민족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기념비도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환경에서 새로운 터전을 일군 역사에는 서로를 도운 사람들의 손길이 함께 남아 있었다. 고난을 견딘 이들의 삶과 그 곁을 지켜 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통일 아저씨’라고 소개한 이재욱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카자흐스탄 지회장은 지금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도 89년 전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라며 당시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고 말했다. 수확을 앞둔 농토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녀를 돌봐야 했던 부모들의 마음도 떠올려 보자고 권했다.
하태욱 주알마티 총영사 역시 학생들에게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했다. 고려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국가가 국민을 지키는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는 당부였다. 어린 시절 강제 이주를 경험한 고려인들을 만나 당시의 기억을 들었던 일도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이번 방문이 오래 간직할 경험이 되기를 바랐다.
그 이야기를 묘역의 풍경과 겹쳐 보자 ‘강제 이주’라는 말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머물 집을 구하고 가족을 돌보며 내일을 준비해야 했던 삶이었다. 오래된 묘비 앞에서 느낀 안타까움에는 그 어려운 시간을 다 알 수 없다는 마음도 섞여 있었다.

정치탄압 위령비의 갈라진 피라미드 형상을 두고는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기념물의 의미를 묻던 청년 기자의 관심은 이 역사를 마주한 세대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로 옮겨 갔다.
이재욱 지회장은 나뉘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먼저라고 답했다.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피라미드가 될 수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으면서도, 서로 떨어진 조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에도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대화는 고려인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이번 여정은 둘째 날 알틴에멜 국립공원으로 이어졌다. 진재정 카자흐스탄 한인회장은 먼 길을 오가며 유적을 잠시 둘러보는 것으로는 이동의 고단함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자연을 경험하는 일정도 함께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자신이 사는 나라를 직접 보고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노래하는 사막’의 모래언덕에서는 강한 바람과 추위를 몸으로 느꼈다. 알마티토요한글학교 김연아 학생(15)은 올봄 사막을 방문했을 때보다 바람이 훨씬 강했고 생각보다 추워 놀랐다고 전했다.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자, 카자흐스탄에도 아직 직접 보고 배워야 할 장소가 많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탐방에서 느낀 것을 어떻게 남길지도 중요한 과제였다. 류명임 알마티토요한글학교 교장은 차세대 교육을 위해 힘을 모은 동포사회에 감사를 전하며 학생들에게 “잘 보고, 잘 기록하고, 잘 기억해서” 자신에게 남은 느낌을 표현해 달라고 당부했다. 글과 그림, 사진과 영상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후기를 남겨 달라는 말이었다.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지 90주년이 되는 2027년을 앞두고, 하태욱 총영사는 학생들과 고려인 청년들이 함께 다시 걸으며 그날을 되새기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바랐다. 이번에 현장을 찾은 청년들에게도 앞으로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당부였다.
우슈토베를 떠날 무렵 지평선은 붉은 석양으로 물들었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저 하늘을 89년 전 이 땅에 도착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고향과 가족을 떠올렸을 수도, 추위 속에서 오늘 하루를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날의 마음을 오늘의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바슈토베의 묘비 앞에서, 그리고 우슈토베를 떠나는 저녁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이 역사가 누군가의 실제 삶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했다. 희미해진 이름들 앞에서 시작된 물음은 그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전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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