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회원국 11개국이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개별 국가가 행사할 수 있는 거부권을 폐지하고, 적격 다수결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집권 기간 거부권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EU의 외교정책 결정이 사실상 마비되는 사례가 발생했다는 판단에서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덴마크, 스페인,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루마니아, 핀란드, 프랑스, 스웨덴 등 11개국은 EU 외교정책 분야에서 만장일치 원칙을 적격 다수결로 바꾸는 방안을 요구했다. 텡그리뉴스는 유로뉴스를 인용해 이들 국가가 최근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카야 칼라스에게 서한을 보내 이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11개국은 서한에서 EU가 이른바 ‘방해성 거부권’ 문제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합의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EU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합의가 공동 행동을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가로막는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EU의 외교정책 관련 결정은 만장일치 원칙을 적용한다. 이에 따라 27개 회원국 가운데 단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해당 사안을 차단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오르반 총리가 16년 동안 헝가리를 이끄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오르반 총리는 EU의 주요 현안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다른 회원국들과 충돌해 왔다.
특히 올해 초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산 석유를 운송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을 둘러싼 갈등으로 EU와 심각한 대립을 빚었다. 당시 오르반 총리는 키이우와의 갈등을 이유로 EU 정상들이 직접 합의한 우크라이나 대상 900억 유로 규모의 대출 지원을 막았다.
텡그리뉴스가 전한 내용에 따르면 11개국은 이러한 ‘오르반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EU 외교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다섯 가지 원칙도 제시했다. 우선 회원국들이 선의의 협력과 상호 연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거부권을 행사하기보다 건설적인 기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외교정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차적인 사안을 외교정책 결정과 연계해 결정을 막는 행위도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EU 조약에 규정된 절차를 활용해 외교정책 분야에서 만장일치제에서 적격 다수결제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제도 전환 자체를 막으려는 회원국이 있다면 ‘정당하고 중대한 국가적 이유’를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EU의 기본 조약에는 일정한 조건 아래 만장일치제를 적격 다수결제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명시돼 있다. 이 방안은 브뤼셀에서 오랫동안 논의돼 왔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외교·안보정책의 신속한 의사결정 필요성이 커지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다만 외교정책 전 분야를 한꺼번에 적격 다수결제로 바꾸는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11개국은 특정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제도를 변경하는 방안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외교정책 개혁 움직임은 오르반 총리가 권력을 내려놓은 이후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내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유럽회의주의 성향으로 알려진 마린 르펜이 승리할 경우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다시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11개국이 이번에 공동으로 개혁을 요구한 배경에는 오르반 총리 집권 기간 나타난 거부권 행사 사례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면서, 향후 EU가 외교정책에서 보다 신속하게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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