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최근 본지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덕성여대 80학번 이혜란 씨가 동기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을 여행하며 남긴 여행기였다. 그들의 생기 넘치는 글을 읽는 동안, 마치 20대 여대생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우리는 어느덧 이곳을 ‘우리 동네’라 부르며,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설렘을 잊고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지는 그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이혜란 씨의 글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2025년 5월 11일 오후3시.
설레임에 들뜬 얼굴로 인천공항에 모두 집합.
덕성여대 국문과 80학번 동창 여덟 명이 육십 중반의 나이로 다 같이 첫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학창시절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3학년 때 국문과 마당극을 처음 만들고 공연(현재까지 국문과 주요 학회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음)한 것을 계기로 40여 년간 극성스럽게 우정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졸업 후, 각자의 인생길,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우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 중 한 친구가 1999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20여 년간 살면서 ‘골든투어’라는 한국인 최초의 현지 여행사를 열어서 언젠가는 친구들과 이곳을 여행하리라는 소망을 키워갔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5년 만에 마침내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5년 만의 방문인데다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무척 설레는 상태였고 다른 친구들도 여덟 명이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에 기대 만땅~
아시아나 직항으로 약 6시간 만에 알마티 도착. 알마티 공항에서 ‘골든투어’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진재정(한인회장)씨와 만나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고 알마티호텔로 이동했다. 일단 18인승 투어버스가 마음에 든다. 5박 7일간 우리를 태우고 다닐 버스는 깨끗하고, 기사님은 핸섬하고, 젠틀하고. ㅋ! 호텔 룸메이트도 매일 뽑기로 정하며 그 작은 이벤트마저 즐겁던 순간들. 첫날을 기념하는 조촐한 술파티를 하고 흩어졌다.
투어 첫날
생각보다 훨씬 풍성한 호텔 조식부페를 맘껏 먹고 투어버스에 올랐다. 호텔에서 보이는 천산산맥의 설산 봉우리들이 이곳이 카자흐스탄임을 명확히 확인시켜 주었다. 달리는 차에서 보는 신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모두들, “와~ 저것 좀 봐!” 즐거운 탄성을 거듭하며 차 안의 신명이 밀도를 높여갔다.
‘악타우’를 향해 가는 도중, 드넓은 평원에서 만난 붉은 양귀비, 양귀비, 양귀비꽃밭!! 환호성을 울리며 홀린듯 달려갔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 아무 걱정도 없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하늘 춤추는 빨간 양귀비꽃들. 친구들은 순식간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 말간 얼굴로 행복하게 웃으며 꽃밭의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넓디넓은 대자연의 품으로 차는 달렸다. ‘악타우’의 능선이 선명하게 가까워지고 드디어 자연의 속살과 만났다. 나로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코스여서 가이드를 따라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보는 경치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왔다. 한 마디로 장관이다. 지구의 어디쯤일까? 우주와의 교신이 가능할 것 같은 기분. 머얼리 펼쳐진 끝도 모를 미지의 세계 속으로 마구 날아가 본다.
돌아가는 길에는 진한 갈색 용암바위 ‘카트타우’ 앞에서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세월을 초월한 자연의 흔적 속에 포근히 안겨본다.

투어 둘째 날
‘노래하는 사막’을 향해 또다시 달린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가히 환상적이다. 이대로 마냥 달렸으면 좋겠다. 지평선이 보이고 시간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듯한 순간이다. 어느새 눈 앞에 떡!하니 나타난 모래산! 일리강에 부는 바람에 실려 날아온 고운 모래알이 쌓이고 쌓여 사막을 이루고, 모래산을 이루고, 얼마나 장구한 세월 동안 강바람이 일고 모래가 날아온 걸까?
이날도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서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입으로 코로 온몸으로 모래가 침입한다. 그래도 기어이 꼭대기에 올라 일리강을 보리라. 바람 맞으며 모래 맞으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앞장서서 올라가는 가이드를 따라 묵묵히 한걸음 또 한걸음.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오늘 여기서 죽어도 될 거 같다.
모래가 날려 뿌연 환각의 세상이 마술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 멀리 일리강이 가느다랗게 흐르고 있는 게 보였다. 긴 강물은 흘러서 어디론가 가겠지. 바람이 분다. 일리강에서 불어온다. 몸을 낮추고 모래사막에 앉아 사막의 한점이 되어본다. 아래쪽에 앉아 있는 친구들도 다 점이 되었다. 있는 힘껏 소리 한 번 질러 본다. 점과 점이 이어진다. 점에서 점으로 이어진다.

한 친구가 내 뒤를 이어 정상에 도착했다. 알 수 없는 연대의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 한없이 점으로 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동영상을 찍어서 고이 간직하고, 두르고 온 스카프를 풀어서 손에 쥐고 바람 퍼포먼스를 하며 푹푹 걸어서 내려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카자흐스탄의 숨은 진주라는 ‘콜사이’ 국립공원의 ‘콜사이’ 호수다.
사막에서 호수로 시간여행을 한 듯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메랄드빛 호수. 첨벙 뛰어 들어가 저 끝까지 수영으로 가고 싶다. 사막에서 달궈진 몸이 초록빛으로 물들지 않을까.?
두 대의 보트에 나눠타고 호수를 한 바퀴 탐색했다. 페달을 밟으니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부드럽게 나아간다. 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합창을 했다. 다른 보트에서도 친구 노랫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통했군. ㅋ!
보트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오는데 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붉은 노을…. 눈물겹게 아름답다. 그럴 때 가슴에 사랑의 에너지가 커진다.
투어 셋째 날
‘카인디’ 호수는 콜사이 호수와 사이즈는 엇비슷한 거 같은데 쭉쭉 뻗은 나무들이 호수에 박혀 있어서 마치 거대한 설치미술을 보는 듯한 풍경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지형이 바뀌며 나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한두 그루가 아니다. 수십(?) 그루가 고요한 호수에서 완전 소멸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풍경에 묘한 감상에 빠지게 된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너도 나도 자연으로 돌아간다. 호숫가에 날아온 원앙 한 쌍이 가족을 이뤄 살아가고 있었다. 저 새들은 아마도 오래 멸하지 않고 이 호숫가에서 세대를 이어 살아가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호숫가 근처에서 말도 탔다. 말은 내가 어려서부터 관념적으로 좋아하는 동물이다. 승마를 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못해서 전국민 말타기운동본부에 체험 신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청자가 많아 추첨에서 떨어졌더랬다.
내가 탄 말은 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것 같았다. 분명히 “잘 부탁한다. 사랑해~”라고 고백하고 출발했건만, 몇 발자국 안 가서 물을 마시려고 갑자기 냇물에 고개를 푹 숙이는 바람에 거꾸로 처박힐 뻔했다. 두 번째 처박힐 위기에 가이드가 고삐를 세게 당기라고 말해줘서 있는 힘껏 당기자 고갤 들었다. 언덕길을 가는 도중에도 풀잎을 먹으려고 다섯 번이나 해찰을 해서 고삐를 이리저리 끌어당겨야했다. 친구 말이 “너 닮아서 에너지가 많은가부다” ㅋㅋ! 무사히 데려다 줘서 고맙다. 말은 순한 동물이다. 잘만 소통하면 광활한 대지를 바람을 가르며 달릴 수 있을 터이다. 고구려 여인의 기상으로 치맛자락 부여잡고….
말 트레킹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깊은 협곡. 블랙캐년을 보고 감탄하긴 아직 이르다. 물론 처음 맞닥뜨렸을 땐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카자흐스탄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차린’ 캐년은 오래 잊지 못할 에피소드의 장소가 되었다. 5월 날씨 치곤 태양 빛이 강렬한데다 며칠째 잠을 설친 친구들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살짝 묻어난다. 그리고 한 친구의 말마따나 이런 엄청난 풍광과 마주서면 왠지모를 외로움 같은 서정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본질적인 고독감, 온 우주에 티끌같이 미미한…. 지구별도 극히 미미한 하나의 별인데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그래서 지구별에 사는 동안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협곡 트레킹을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일어난 사고 아닌 사고로 살짝 긴장이 풀렸던 친구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큼 놀란 일이 생겼다. 한 친구가 나무로 된 이름자 위에서 뒤로 넘어간 것이다. 한 바퀴만 굴렀기 망정이지, 두 바퀴 굴렀으면…. 생각 만해도 아찔하다. 다친 데 하나 없이 말짱했지만 전체 텐션이 하늘을 찔렀다. 소리 지르는 친구, 우는 친구, 달려가 잡고, 일으키고 난리 부르스를 쳤다. 이 에피소드는 몇 년짜리 술안주일까? ㅋ!
이날 마무리는 온천욕이었는데 유황 냄새가 자욱한 탕에 들어가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이 온천의 주인장으로 친구와 잘 알고 지냈다는 한국인 부부의 환대를 받으며, 친구의 카자흐스탄 삶이 외롭지만은 않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얼굴들. 그 속에서도 강인하게 성공적인 삶을 이룩한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 다음 호에 2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