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이들은 토굴을 파고 들어가 겨울을 견뎌야 했고, 언어도, 국적도, 재산도 없이 오직 생존만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농업과 교육, 문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역사회에 뿌리내렸고, 카자흐스탄은 이들을 품어주었다. 고려인들은 이 땅에서 살아남았고, 살아냈으며, 살아가는 법을 후손에게 전했다.
1990년,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창립되면서 고려인 사회는 조직적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35년간 협회는 문화 보존과 세대 간 연결, 한국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올해는 그 창립 35주년을 맞아 알마티 곳곳에서 기념 행사가 이어졌다. 단순한 축하를 넘어,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되새기는 자리였다.
가장 상징적인 행사는 9월 12일 알마티 외곽 알라타우시에서 열린 ‘K-파크’ 기공식이었다. 이 문화·비즈니스 복합센터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공동체 형성 9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로, 고려인의 역사와 카자흐 민족의 우정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조성된다. 알마티주 마라트 술탄가지예프 주지사는 “건축과 자연, 기억과 존중이 어우러지는 공간의 시작을 함께 한다”며, K-파크가 지역 주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문화적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K-파크는 알라타우시의 중심인 ‘골든 디스트릭트(Golden District)’에 위치하며, 총 10헥타르 규모로 조성된다. 이곳에는 휴식 공간, 민족문화 구역, 도서관, 박물관, 어린이 놀이터, 야외 영화관, 겨울 스케이트장, 스포츠 트레일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중심에는 ‘감사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는 고려인 이주민의 삶에 있어 카자흐 민족이 보여준 환대와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역사 재현 구역에는 전통 한옥이 복원되고, ‘고려 사람(Kore Saram)’이라는 인터랙티브 공간을 통해 방문객들이 고려인의 문화와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 연간 최대 350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주차장, 푸드코트, 전기차 충전소, 이슬람 기도 공간 등도 함께 마련된다. 한국의 연구진이 건축 설계의 전통성과 문화적 적합성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알라타우시는 카자흐스탄 대통령령에 따라 국책사업으로 승격된 신도시이며, 현재 중국의 대규모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과 한국 기업들은 초기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국책사업 전환 이후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G4 City 프로젝트에서 한국 기업들이 행정 절차와 현지 파트너십 조율 실패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경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번에는 보다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알라타우시 개발 계획은 2008년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앞으로 얼마나 구체적으로 진행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향후 추진 동력에 따라 과거의 전철을 되짚을지, 아니면 진정한 디지털 도시로서 K-파크가 조성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한편, 9월 13일에는 알마티 국립오페라발레극장에서 창립 35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공연은 고려인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문화적 서사로 구성되었으며,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예술가들과 한국에서 초청된 공연단이 함께 무대에 올라 음악과 춤, 영상으로 고려인의 88년 역사를 풀어냈다. 이주와 정착, 성장과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문화적 성찰의 장이었다.
이번 35주년 행사는 고려인협회의 역사적 궤적을 되짚는 동시에, 카자흐스탄 사회 속에서 고려인이 어떤 미래를 그려갈 수 있을지를 묻는 자리였다. 토굴에서 시작된 삶이 디지털 신도시로 이어지는 이 상징적 흐름은, 단순한 개발이나 문화 보존을 넘어, 고려인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고려인은 다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