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알마티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열차 37호』는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한 예술적 기록이었다. 이 작품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라는 역사적 비극을 배경으로, 고려인의 삶과 사랑, 상실과 재생을 무대 위에 밀도 높게 펼쳐냈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한다. 본래는 “씨앗을 흩뿌리다”는 뜻으로, 살던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식민지 건설이나 인구 확산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던 용어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시간이 흐르며 단순한 이주를 넘어,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고향을 떠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역사적·정서적 경험을 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떠나는 디아스포라가 있는 반면,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강제로 끌려가는 디아스포라도 있다. 『열차 37호』의 시작은 후자의 디아스포라를 다룬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숨결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열차에 실려 알 수 없는 땅으로 향하던 그 순간, 그들은 이미 한 차례 죽음을 겪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핵심은 단지 ‘흩어짐’에 있지 않다. 언어, 종교, 문화 등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며, 낯선 땅에서도 스스로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그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집단적 희망, 고향에 대한 기억과 이상화된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속 귀환이 아닐지라도, 노래와 이야기, 전통과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귀향의 신화’다.
뮤지컬 『열차 37호』는 바로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정서적 풍경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떠나야 했던 이유, 남겨진 것들,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몸짓들. 그 모든 장면은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의 깊이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작품은 도균, 순례, 만식이라는 세 인물과 그들의 자녀인 마야, 비탈리를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독립군 도균은 매국노 추근덕에게 희생되고, 순례는 낯선 땅에서 딸 마야를 낳는다. 만식은 이름을 게오르기로 바꾸고 알마티에서 고려극장을 이어간다. 이들의 삶은 단절과 재생, 상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디아스포라의 전형이다. 특히 만식의 아들 비탈리와 마야의 사랑은 추근덕의 아들인 표드르의 질투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고, 비탈리는 타국의 전쟁에 희생된다. 이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두 번째 죽음을 상징하지만, 그 결실인 아나톨리의 탄생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며,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디아스포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공연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고 정체성을 되묻는 예술적 장치로 기능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노래와 대사, 조명과 영상은 고려인의 고단한 여정을 감각적으로 재현했고, 관객은 그들의 삶을 따라가며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의 무게를 체감하게 된다.
『열차 37호』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피어난 삶의 ‘씨앗’을 기억하고, 그 ‘씨앗’을 오늘의 무대 위에서 다시 싹틔우는 예술적 선언이다. 마야가 홀로 아들을 키우며 조국 해방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장면은, 디아스포라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존엄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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